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으면, 시간이 이상하게 흐른다.
삑삑거리는 소리, 빛나는 화면, 휘황찬란한 잭팟 사운드.
눈앞에선 누군가가 환호성을 지르고, 내 손가락은 또 한 번 스핀 버튼을 누른다.
“이번엔 될 것 같아.”
이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.
슬롯머신은 도박이라기보다, 기다림의 예술이다.
‘잭팟’이라는 단어가 가진 마법은 그 기다림을 꽤 달콤하게 만들어준다.
작은 기대, 큰 환상
내가 슬롯 앞에 처음 앉았을 땐, 사실 별 기대 없었다.
“뭐, 몇 번 눌러보고 안 되면 말지” 정도였다.
근데 이상하게 한 번 눌러보고 나면, 그다음 한 번이 궁금해진다.
지금까지 잃은 거야 그냥 재미로 쓴 거고,
“다음 스핀이 진짜일 수도 있잖아?”
슬롯은 우리가 스스로를 설득하는 게임이다.
어떤 논리도, 수학도, 그 앞에선 무력하다.
기계가 보여주는 확률은 철저하게 무정한데,
우리 마음은 늘 그 확률을 감성으로 보완하려 든다.
슬롯 앞에서 흐르는 하루
슬롯 머신 앞에 앉은 지 세 시간째.
처음엔 몰랐는데, 시간 개념이 진짜로 흐려진다.
화장실도 안 가고, 물도 안 마시고, 오직 ‘다음’만 바라보게 된다.
주변을 둘러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다.
누구는 초조한 손놀림으로 버튼을 누르고,
누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본다.
다들 비슷한 표정, 다른 속마음.
“이번에는 진짜 될 거야.”
슬롯 앞에서는 누구나 잠시 꿈을 꾼다.
아주 짧은 꿈.
그 짧은 꿈을 위해, 하루 종일 버튼을 누르며 앉아있는 것이다.
이긴 사람, 진 사람
가끔은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다.
“됐어! 잭팟이야!”
순식간에 그 주변이 술렁인다.
그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이고,
나머지는 은근히 부러움 섞인 박수를 친다.
하지만 그런 장면은 정말 드물다.
대부분은 잭팟을 기다리다, 조용히 떠난다.
표정엔 아쉬움보다, 피곤함이 더 짙다.
슬롯머신은 ‘이기는 사람’이 아니라,
‘기다리는 사람’이 주인공인 게임이다.
나만의 의식들
슬롯 앞에서의 하루가 길어지면, 사람마다 루틴이 생긴다.
나는 주로 세 번에 한 번은 오른손,
다섯 번에 한 번은 왼손으로 눌러준다.
괜히 그러면 운이 바뀔 것 같아서.
또 한 가지, 무조건 잃었을 땐 눈을 감고 한 번 더 돌린다.
그냥 화면을 안 보면, 덜 아까운 기분이 든다.
웃기지만, 슬롯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도구다.
사람의 성격, 운에 대한 믿음, 참을성까지 다 보여준다.
잭팟은 어디쯤 있을까
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,
슬롯머신 앞이다.
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, 한 손으론 버튼을 누르고 있다.
내가 바라는 건 큰 돈이 아니다.
딱 한 번,
화면이 멈추고
불빛이 터지고
사람들이 나를 돌아보는 그 순간.
그 순간을 꿈꾸며,
또 한 번 스핀.
돌아가는 릴 속의 나
슬롯머신의 릴이 돌아갈 때,
사실 돌아가는 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.
오늘은 이기고 싶고,
내일은 그냥 즐기고 싶고,
모레는 후회할지도 모른다.
하지만 그 모든 감정이 녹아 있는 게 바로 ‘긴 하루’다.
그리고 그 하루는,
잭팟이 아니어도
나름대로 의미가 있다.
언젠가 터질 그날을 기다리며
언젠가, 정말 언젠가,
딱 한 번이라도 그 순간이 온다면
오늘 이 긴 하루도,
참 잘 보낸 하루가 될 거다.
슬롯 앞에서의 하루는
기다림의 기술,
자기 위로의 반복,
작은 기쁨의 연속이다.
그러니까 오늘도 나는 앉아 있다.
지금 또 한 번, 스핀.